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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부자, 밀레니얼, 부지런한 intp, 영어도 조금하고 불어도 아주 조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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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소공녀
    책, 영화, 컨텐츠/영화 2019. 6. 28. 16:00

     소공녀는 무슨 뜻일까 한참 고민하면서 영화를 봤다. 근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아마 작을 에 빌 空을 쓰지 않았을까? 사실 공간을 뜻하는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사전에 공은 그냥 빌 공으로만 나와있어서 왜 인지 머쓱해졌다.

     가난을 그리지만 구구절절하지 않고 여름날 발바닥에 쩍 하고 달라붙는 싸구려 장판 같은, 찌든 느낌이 없는 영화라는 평을 들었기에 꼭 보고 싶었는데,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를 쉽게 보는 방법은 넷플릭스에 들어오는 것이었기에 들어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들어온걸 발견하고 나서도 보지 않고 있다가, 유난히 여름이 느지막히 오는 올 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끝자락에 드디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냉소적인건 쉽다, 진짜 어려운건 냉소적이 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라던 어느 전설적인 락스타의 말이 생각났다. 미소는 그런 락스타 같은 사람이었다. 청소 일을 하며 하루 오만원을 버는 그녀가 쓰는 가계부는 단촐하다. 밥 값 만원, 약 값 만원, 월세 만원, 담배 이천 오백원, 위스키 만 이천원. 이렇게 쓰면 끝이 난다. 몇 천원 남는 돈을 모아보지만 역시나 티끌은 모아도 티끌이었다. 그의 남자친구는 공장에서 일하는 웹툰 작가 지망생. 그러나 번번히 공모전에서 낙선하고 미소와 비슷하게 생활도 넉넉하지 못해 자신이 미소를 고생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2015년의 첫 날, 담뱃값이 거의 2000원이 올라버린 그 날. 미소는 자신의 단출한 가계부에서 월세 항목을 없애기로 한다. 그리곤 짐을 싸서 여행하듯 살아가는 삶을 시작한다. 미소가 떠난 여행지는 대학시절 같이 밴드를 했던 친구들의 집이었다. 계란 한 판을 선물로 들고 그녀는 여행지를 방문한다. 대학 때는 분명 다 같이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포커 치던 친구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미소는 다섯명의 친구를 만난다. 한 명은 그의 집에 가 볼 기회도 주지 않았고, 두 명은 미소에게 위로 받으며 남은 두 명은 결국 미소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한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것은 폭력이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두말할 나위 없이 구질구질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찌질한 청춘 담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주인공 미소의 태도가 있다. 이 가느다란 빛이 영화 전체를 따뜻하게 비추는 백열등 같은 역할을 했다.  여행하듯 살아간다는 그의 말은 솔직하고 진실된 말이다. 얼마나 진실 되냐면 그녀 자신에게도 솔직한 말이다. 부정적인 상황을 억지로 스스로에게 용인시키려고 노력한 말이 아니라 그냥 아 이거 여행이다 하고 이름 지은 느낌이었다. 돈과 집은 없지만 생각과 취향은 있다는 그의 말은 그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말 그대로였다.

     그래서 미소는 본인이 가장 추운 곳을 걸어 다니는 순간에도 영화를 보는 나를 가장 따뜻하게 해줬다.

     영화의 마지막에 백발이 된 그가 나타난다. 가계부에서 월세를 지운 그가, 아마 이제는 약을 포기한 것이겠지. 아마 물가는 계속 오를 것이고 대학까지 중퇴하고 별다른 경력을 쌓지 않은, 휴대폰마저 끊긴 그가 더 나은 임금을 받을 확률은 낮겠지. 그럼 그 다음에 그가 지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행하듯 살아가는 그가, 폭력을 감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가, 근사한 생각과 멋진 취향을 가진 그가 근사하면서도, 조금은 마음이 쌀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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